19일 은림(맨 왼쪽)양이 주민자치센터에서 이 지역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정대현기자 jhyun@

이곳에서 은림(14·대신여중1)이는 동생뻘의 아이들을 돌아보며 악보에 있는 음표 하나하나를 읽어 준다. 시끌벅적하던 아이들도 음표를 읽을 때만큼은 놀라운 집중력이 되살아난다. '아,솔이네'. 여기저기서 탄성이 들린다.



오카리나 수업을 하고 난 후 은림이는 책상에 아이들과 모여앉아 생활영어 수업을 시작한다. 2년간 뉴질랜드에서 살다 온 영어 실력을 동생들에게 유감없이 발휘하는 순간이다. 은림이는 누가 뭐래도 이 작은 학교에서 '선생님'으로 불린다.



은림이와 이곳 아이들과의 인연은 은림이의 어머니 정미경(42)씨와 필리핀에서 낯선 이곳을 찾은 제나이타(41·여)의 만남에서 비롯됐다.



정씨는 지난해 9월 이곳 충무동 주민자치센터에서 국제결혼이주여성인 제나이타를 처음 만났다. 정씨는 한국어를 배우려 자치센터를 찾은 제나이타를 직접 가르치게 됐다. 이후 둘은 절친한 친구로 변했다. 한국어를 가르치고 배우면서 정씨의 따뜻한 마음은 제나이타에게 전해졌다. 제나이타도 낯선 땅에서 닫혀 있던 맘을 정씨에게 열 수 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인연은 2대째 이어지고 있다. 정씨는 그의 딸인 은림이에게 제나이타의 아들인 승진(10·토성초3·가명)이를 직접 가르쳐 볼 것을 권유했던 것. 은림이는 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렇게 해서 지난 11월부터 은림이는 승진이의 가정교사가 됐다.



은림이와 승진이의 소식을 전해들은 충무동 동사무소 측은 좋은 아이디어 하나를 내놓았다. 또래 아이들끼리 가르치고 배우며 어울릴 수 있는 작은 자치학교를 만들어 볼 요량으로 은림이에게 자치학교 선생님으로 나서 볼 것을 제안한 것.



동사무소 측은 제나이타를 비롯한 국제결혼이주여성들의 자녀들이 수업을 받을 수 있도록 동사무소 주민자치센터 내에 작은 공간을 마련해줬다. 또 방학기간 중 학교와 사회로부터 소외된 아이들도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지난 2일부터 시작된 자치학교에는 태신이를 비롯해 10명의 초등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이제 필요한 건 선생님들. 은림이가 자치학교 선생님으로 나섰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은림이의 학교 친구들은 물론 여동생 은희도 선생님으로 참가해 현재 6명의 막강(?) 강사진이 구축됐다. 이들이 가르치는 과목은 국어,영어,수학,과학,사회 등 주요 과목들을 망라한다. 오카리나 수업은 기본이다. 또 일대일 수업,단체수업,자유토론수업 등 수업 방식도 다양하다.



"엄마가 해보라고 해서 시작했는데 지금은 아이들이랑 정이 들어 책임감이 생길 정도가 됐어요."



은림이는 앞으로도 계속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다며 함빡 웃었다. 충무동 주민자치센터 관계자는 "흔히 사람들은 이들을 '코시안'이나 '결식아동'이라고 부르지만 그 단어만큼 아이들 사이에서 커다란 벽을 만드는 말은 없다"며 "학교나 사회에서도 또래 아이들과 하나된 관계를 지속하도록 앞으로도 아이들 사이에 '2촌 맺기'운동을 펼쳐 지금의 인연이 그대로 이어지도록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대성기자 nmaker@busa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