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인 지난 13일 오후. 홍콩의 행정·경제 중심지인 센트럴 지역엔 중국인과는 사뭇 다른 외모의 젊은 여성들이 가득하다. 이들은 광장이나 공원은 물론이고 고층빌딩 사이, 계단, 육교 등 햇볕을 피할 그늘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든 자리를 잡고 돗자리를 편다. 그리고 삼삼오오 둘러앉아 해가 질 때까지 까르르 웃으며 대화를 나눈다.

각자 준비해온 음식을 나눠먹는가 하면 책·잡지·신문 등을 돌려보기도 한다. 홍콩의 대표적 마천루 중 하나인 홍콩상하이은행(HSBC) 본점 1층의 시원한 그늘 공간엔 너무나 많은 사람이 모여 마치 태풍이나 집중호우 때의 이재민 대피소를 보는 듯 했다. (아래 사진 참조)

일요일만 되면 홍콩 시내를 사실상 ‘점거’하는 이 여성들은 필리핀에서 온 이주노동자다. 맞벌이 부부가 대부분인 홍콩엔 필리핀 가정부를 고용한 집이 아주 많다. 홍콩인들이 ‘아마’라고 부르는 필리핀 가정부는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영어도 곧잘 구사해 인기가 썩 높은 편이라고 한다.

이처럼 국경을 넘는 가정부 취업 뒤엔 필리핀·홍콩 양 정부의 양해가 있다. 필리핀 여성들의 근로 계약은 홍콩 당국의 보장 아래 2년 단위로 이뤄지며 최저임금제 원칙이 철저히 적용된다. 이들의 왕복 항공비 또한 홍콩 측의 부담이다.

필리핀의 웬만한 일자리보다 보수가 많은데다 주 1일의 휴일, 연 14일의 유급휴가를 쓸 권리 또한 부여된다. 이처럼 근무 여건이 좋아선지 필리핀에서 명문대학을 나오고도 가정부 취업을 위해 선뜻 홍콩행을 택한 여성이 많다고 한다.

일주일에 단 하루 주어지는 휴일이 바로 일요일. 이날은 일할 필요가 없는 대신 주인집 식구들을 위해 오전부터 저녁까지 밖에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 대신 홍콩인들은 오랜만에 가족끼리 오붓한 시간을 즐긴다. 일요일만 되면 홍콩 시내의 모든 광장·공원이 필리핀 여성들 차지가 됨은 이 때문이다.

외국인 입장에선 이들이 어려운 경제사정 탓에 낯선 곳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일요일 오후 홍콩 중심가를 ‘점령’한 필리핀 여성들의 얼굴에서 근심이나 불만을 찾긴 어려웠다. 대다수가 웃고 떠드느라 정신이 없었으며, 일부는 고국 노래에 맞춰 한바탕 춤판을 벌이기도 한다. (위 사진 참조) 우리나라의 국회의사당에 해당하는 입법회 건물 앞에는 이들을 위한 공연팀까지 ‘출동’할 정도였다. (맨 아래 사진 참조)

홍콩에서 15년 넘게 살았다는 한국인 J씨는 “다 같은 아시아의 형제·자매인 만큼 저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홍콩 사정에 밝은 또다른 한국인 S(여)씨는 “우리나라 사람이 이런 상황이라면 저들처럼 몰려나와 춤을 추고 즐길 수 있을까 싶다”며 “필리핀 국민들의 낙천주의가 멋있게 느껴진다”고 평가했다.

홍콩=글·사진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