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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9-03-19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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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한국 사회를 옥죄는 혈통주의 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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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라는 말을 낳은 2세기 로마의 5현제 중 네 황제는 모두 양자에게 제위를 계승시켜 로마제국의 전성기를 일구었다. 철학자 군주로 유명한 5현제의 마지막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친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주었으나 그 아들은 불행히도 네로와 쌍벽을 이루는 폭군 콤모두스였다. 그의 치세를 계기로 로마제국은 기나긴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물론 로마의 현제들이 양자를 후계자로 삼은 이유는 그러고 싶어서가 아니라 아들을 낳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마에는 제정이 성립하기 훨씬 전부터 군주나 귀족이 휘하의 유능한 인물을 양자로 삼아 지위를 물려주는 전통이 있었다. 이 점에서 같은 황제라도 중국의 황제는 로마의 동업자와 달랐다. 하늘의 아들(천자)이라는 별명에 어울리게 중국 황제는 대가 끊기는 일이 없었다. 왜 그랬을까? 바로 아내가 여럿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황제는 황후 이외에 수많은 후궁을 거느렸기에 적어도 후사가 없어 황실의 주인이 바뀌는 경우는 드물었다.
우리 역사에서도 그 점은 마찬가지다. 고려의 왕건은 개국 초기 호족들과의 혈연을 통해 권력을 안정시키기 위한 전략 때문에 약 30명의 아내와 약 20명의 아들을 두었다. 조선의 태종은 11명 이상의 아내에게서 12명 이상의 아들을 두었고, 성종은 12명의 아내에게서 아들을 무려 16명이나 낳았다. 정비의 아들은 대군, 첩실의 아들은 군이라는 호칭으로 구분했으나 어머니가 달라도 아버지만 왕이면 누구나 왕위 계승권자가 될 수 있었다. 거꾸로 말하면 생물학적으로 왕의 혈통을 이어받아야만 왕위 계승권을 얻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통치의 기술에도 유전법칙이 적용되지는 않을 텐데, 혈통이 그리도 중요했을까? 그 부작용은 컸다. 동양식 왕조에는 늘 같은 혈통의 계승권자가 많았던 탓에 ‘왕자의 난’이 끊이지 않았다. 중국 황실은 환관과 외척이 막후 실력자로 군림하는 고질적인 병폐에 시달렸고, 우리나라 왕실에서도 외척이 중앙정치를 주무르는 폐해가 컸다. 우리 역사상 가장 부패가 심했던 19세기 세도정치 시대에는 왕실 외척이 사실상 ‘집권’하면서 나라를 완전히 말아먹었다.
그런데 문제는 혈통주의가 왕조시대만의 유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과거와 달리 합리성이 관철되는 현대 사회에서도 혈통주의는 생물학주의로 변형돼 우리 사회에 강고하게 남아 있다. 기업계에 만연한 족벌주의는 생물학주의의 직접적인 표현이며, 지연이나 학연을 강조하는 연고주의는 그 간접적인 변종이다. 생물학주의는 영어로 ‘biologism’, 족벌주의는 ‘nepotism’이라고 말하지만 연고주의는 적당한 번역어도 없을 만큼 우리 사회 특유의 폐단이다.
생물학주의는 거시적 차원만 아니라 미시적 측면에서도 드러난다. 해외로 입양아를 가장 많이 보내는 나라라는 불명예는 바로 우리 사회의 강력한 생물학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외국 문화를 배척하고 외국인 노동자를 차별하는 태도, 장기와 골수의 기증이 일반화되지 못하는 현상, 심지어 서양의 기독교 문화와는 다른 맥락에서 안락사에 대한 거부감이 강한 분위기에도 생물학주의의 흔적이 있다. 늘 존치 여부가 논란이 되는 사형제도도 마찬가지다. 언제부턴가 사형제도를 반대하는 것이 인권을 존중하는 진보적 태도인 것처럼 간주되고 있지만, 인간이 생물 유기체로서만 존재 의의를 갖는 건 아니다. 죽어 마땅한 죄를 짓고도 목숨으로 죗값을 치르지 못한다면 오히려 비인도적인 제도가 아닐까?
이와 관련해 사소하지만 주목할 만한 사례가 있다. 강력범죄나 후안무치한 범죄 사건이 보도되면 인터넷 댓글에서 네티즌들은 흔히 “자기 가족이라면 그렇게 했겠느냐”고 말한다. 심정은 이해하지만 논리에는 명백한 문제가 있다. 가족이 아니라 해도 그런 범죄를 저지르면 안 될 테니까. 가족을 내세우는 어법이 설득력과 호소력을 갖는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에 생물학주의적 사고가 얼마나 뿌리 깊게 박혀 있는지 짐작케 한다.
남경태 역사 및 철학 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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